<한소리>

이 시대에 필요한 능력

 

 

장 성 익/ <환경과생명> 편집주간

 

망언(?)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모든 독일 집을 온통 새로 칠했다네//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 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버렸다네// 오 칠장이 히틀러여/ 왜 자네는 벽돌장이가 되지 못했나? 자네의 집은/ 회칠이 비를 맞으면/ 그 속의 더러운 것들이 다시 드러난다네/ 그 똥뒷간 전체가 다시 드러난다네//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3년에 쓴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라는 시의 전문이다. 한때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다는 히틀러를 ‘칠장이 히틀러’라고 신랄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는 시다. 어떤가. 혹시 이 시에서 ‘칠장이 히틀러’를 ‘삽질 이명박’ 혹은 ‘불도저 이명박’으로 바꾸어 읽는다면 무리일까? 과장일까?

브레히트는 또 ‘해결방법’이라는 제목의 이런 시도 남겼다.

“6월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두 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동독에서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다. 이에 대해 동독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만의 소련군과 수백 대의 탱크를 앞세워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한다. 이 시는 이런 상황에서 씌어졌다. 이른바 ‘인민의 나라’, ‘노동자의 나라’라고 선전되는 곳에서 바로 그 인민과 노동자를 힘으로 짓밟는 권력에 대해 브레히트는 참으로 ‘간단한(?)’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라는 것이다. 인민의 뜻을 거스르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권력에게 날리는 통렬한 ‘똥침’이 아닐 수 없다. 독자 여러분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이 나라의 대통령을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히틀러에 빗대거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에 대해 ‘다른 인민을 선출하라’는 식의 ‘망언(?)’을 들이대는 것은 안타깝고도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노라면 브레히트의 시에서 이명박 정권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4대강 사업과 언어의 타락


이를테면 대표적으로, 목하 온 나라 곳곳에서 강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보라. 두말할 필요도 없이 4대강 사업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채 애오라지 성장과 개발의 깃발 아래 야만스런 폭주를 계속하고 있는 토건주의 권력이 자행하는 희대의 범죄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정부가 이 사업과 관련해 내놓는 얘기나 저지르고 있는 짓들을 보면 도무지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거짓과 억지와 술수이고, 이게 제대로 먹혀들지 않으니 온갖 불법․탈법․위법․초법적인 무리수 남발에다 일방적인 속도전 식의 밀어붙이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니 환경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진영은 물론 대다수 국민과 수많은 전문가들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최근 들어서는 생명과 평화의 추구를 자신의 본령으로 삼는 종교계에서도 전면적인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 과학 권위지인 <사이언스>가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상세하게 내보내고 국제 환경운동단체들도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는 데서 보듯이, 바야흐로 4대강 사업은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국제적 이슈로도 급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동체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막가파’ 권력의 시대착오적인 아집 탓에 나라 안이 온통 엉망진창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입만 열면 ‘선진화’니 ‘국격(國格)’이니 하는 따위의 구호를 내세우는 정부가 할 짓인가.

저들은 수십 년을 이어온 유기농 단지를 깡그리 갈아엎으면서 세계 유기농 대회를 열겠단다. 그렇게 유기농을 파괴하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멸종 위기종들과 이들의 서식처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면서 그 자리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따위로 치장한 ‘생태공원’을 만들겠단다. 조상 대대로 강변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어온 수많은 농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고 그들의 생존권을 유린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단다. 하천의 자연적인 흐름을 복원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라는 객관적 사실에는 애써 눈을 감은 채, 포클레인과 불도저 따위의 쇳덩이를 총동원해 멀쩡한 강을 콘크리트로 처바른 인공 수로로 만들면서 ‘물 관리 글로벌 리더’가 되겠단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연과 사람과 문화와 역사를 난폭하게 ‘죽이는’ 것이 4대강 사업의 실체임에도 이것을 4대강 ‘살리기’라고 강변한다. 국토 생태계의 골간이자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젖줄인 강의 숨통을 끊어버리면서도, 이러한 야수적인 개발과 건설의 난장판에다 ‘녹색’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이런 모습에서 역사의 슬픈 반복을 본다. 가령 ‘한국적 민주주의’는 박정희가 부르짖던 구호다. ‘정의사회 구현’은 전두환이 온 나라에 내걸었던 표어다. ‘보통사람들의 시대’는 노태우가 드높이 펄럭였던 깃발이다. 한데 종신 총통을 꿈꾸며 이 나라와 온 국민을 폭압적인 파시즘의 동토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민주주의라니?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원흉이자 권력을 앞세워 수천억 원을 강탈한 파렴치범이 정의사회라니? 이러한 학살과 강도질의 또 다른 주범이 보통사람이라니? 비극적인 희극이자 희극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고, 두루 어처구니없고 얼토당토않기는 오십보백보다.

물어보자. 이들과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 무엇이 다른가? 민주주의의 퇴행, 성장과 개발지상주의의 창궐 등과 같은 측면에서도 대동소이하지만, 무엇보다도 ‘말과 언어에 대한 모독’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과 언어부터 망가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독재 권력의 공통적인 속성이자 지배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꼭 이런 지적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언어가, 말이 이처럼 극도로 타락하고 오염되고 거꾸로 선 곳에서 어떤 존재라도 제 운명이 온전하기를 기대할 순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적․윤리적 기초, 곧 공동체의 ‘정신’이 허물어졌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맥락이 통한다. 같은 표현을 쓰면서도 그 말이 뜻하는 바가 전혀 소통되지 않고, 나아가 권력을 쥔 강자가 자신이 제멋대로 의미 규정한 왜곡된 언어를 사회 전체에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곳에서 어찌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겠는가. 이명박이 통치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딱 이 꼴이지 않은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강에는 강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강은 단지 물리적인 자연 생태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강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용적’인 용도라는 측면에서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강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고결함이 함께 흐르고, 자연과 생명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신비스러움과 거룩함이 함께 흐른다. 강은 자연이기도 하지만 ‘인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강을 파괴하는 것은 생태적․사회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예술적․미학적 범죄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적 범죄이기까지 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릇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것에 대한 경외심, 자연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의 결속의식, 나 자신과 우주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의 일체감, 타자, 특히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식 등이야말로 제대로 된 종교와 문화예술의 고갱이가 아닐까? 또한 이런 감각, 이런 느낌이야말로 참된 ‘인간성’의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가장 중요한 베이스캠프가 아닐까?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이 끝내 강행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품위 혹은 명예의 치명적인 파탄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곱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물결에 반짝이는 햇살과 강물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놀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으로 직선화된 인공의 콘크리트 장벽이라는 괴물에 갇혀 흉측하게 변해버린 ‘죽음의 풍경’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약동하는 생명의 노래와 춤이 사라진 그런 곳에서, ‘살아 있음’의 풍요로운 구체성이 증발해버린 그런 곳에서,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사연들은 온데간데없고 차디찬 물신의 바벨탑만이 ‘명박산성’처럼 앙버티고 선 그런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맹목적인 성장과 개발과 발전의 환상에 취해 돈과 기계의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려야 할까. 도대체 언제까지 경쟁과 효율과 속도의 신화에 휘둘리면서 자본과 시장의 부속품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제 우리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이 세상에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과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승인해야 한다. ‘고통’과 ‘결핍’과 ‘불편’을 무작정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능력, 즉 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 그리고 ‘고통’과 ‘결핍’과 ‘불편’을 자발적으로 견딜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야만의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능력인지 모른다.

성장과 개발을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태껏 그리 해왔고, 또한 모든 시스템과 제도와 문화가 여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성장과 개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너무 멀리 달려간 것은 아닌지, 너무 빨리 달려온 것인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해 추구해야 할 것은 성장과 개발이 아니라 ‘삶’과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