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
■ 바닥에 떨어진 정치에 대한 신뢰도
2009년 6월 <중앙일보-동아시아연구원>이 공동 실시한 ‘2009 파워조직 25곳 영향력-신뢰도 평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조직의 영향력 평균이 5.2~5.6점인 데 비해 각 정당은 4점대 초반으로 중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닥에 떨어진 신뢰도이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25개 기관의 평균 신뢰도가 4.6~5.1점인 데 비해 정당은 3점대 후반에 불과하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각각 24위와 25위를 기록했다. <시사저널>이 2009년 9월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실시한 직업 신뢰도 조사는 더욱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주는데, ‘정치인’은 33개 직업군 중 최하위이며 신뢰도는 겨우 11.7%에 불과했다. 정치인, 정당에 대한 낮은 신뢰도는 정치에 대한 불신의 반영이자 정치에 대한 불신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기도 하다. 올해 정치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상을 볼 때 내년에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이처럼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보다는 당리당략만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정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정치에서 진실이 통하지 않고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것이다. 신뢰도는 말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것이 때문이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공자가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라며 명분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정치에서는 정당, 정치인들이 공적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논리의 양심’마저 저버리고 이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거창한 도덕적 양심을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주장들에 대한 논리적 진위를 검증은 하고 그에 대한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공적 토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정치인들, 특히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 사이의 논리적 모순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발언을 일삼는데 어떻게 공적 토론, 그리고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정치가 공공선을 올바른 방법과 절차를 통해 추구해야 한다는 규범적 요구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사적 목적을 위해서 거짓, 모략 등의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갔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의 많은 사람을 보아왔는데 비록 고관대작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한 말을 공평하게 검토해보면 열 마디 말 중 일곱 마디가 거짓이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서울거리에서 자라난 너희들은 이런 거짓말을 하는 습관에 잘못 물든 게 없는지 모르겠다”고 충고하는 구절이 나온다. 탄핵을 받고 유배를 떠난 몸이니 정치판에서의 거짓과 술수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그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거짓에 타협하지 않고 곧은 자세를 유지한 덕이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정치와 거짓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정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사태가 이렇다면 아예 정치를 없애버리는 것도 방법은 아닌가? 이러한 방법을 찬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정치를 소멸시키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그것이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좌절감을 준다는 것은 후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점차 정치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좋은 방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우선, 정치가 눈앞에서는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정치적 기능은 계속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공적 자원을 형성하고 분배하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 장막 뒤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당연히 장막 뒤를 지배하는 집단들의 이익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정치의 소멸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한때는 정치를 소멸시키기 위해 엄청난 비용과 강제력을 동원하고서도 실패했었는데, 이제는 저절로 소멸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또한, 정치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보장되는 합법적 공간이다. 한계는 많지만 정치, 특히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인 보통·평등선거는 모두가 평등하게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19세기 말에만 해도 보통선거에 혁명적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이 많았다. 노동자, 서민들이 투표권을 갖고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 변화였으며 보통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변화는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이는 보통사람들의 요구가 가장 안정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통로이다. 이러한 통로를 우회해 다수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실패한 실험이 되었다.
정치가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어렵더라도 정치, 정당과 정치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계속 모색해가야 하는 것이다.
■ 소통의 정치를 위한 출발점
정치에 대해 불신감이 아무리 높은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의 긍정적 역할도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된다. 1987년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경중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난 시기에는 정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은 심각했지만(이는 민주주의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긍정적 역할의 하나이다), 적어도 오늘 말이 내일 말과 다른 노골적인 거짓과 위선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부정적이었다는 주장과는 달리, 한국경제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성장 동력 중 많은 부분이 민주주의의 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재와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화산업들이 발전하고 한류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언론에 통제가 심한 사회에서 통신산업이 발전될 수 있었겠는가? 정치인과 정당의 개별적 행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참여 속에서 발전된 민주주의와 그 성과를 보고 그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민주주의는 공기처럼 우리 곁에 항상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이제는 공기도 점차 희소재가 되어가고 있어 현재 추세가 계속 된다면 이러한 비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실성을 상실하겠지만), 이를 위해 비용을 치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증가해왔다(민주주의도 환경과 마찬가지로 비용을 치르지 않고서는 보호되기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는 날로 각박해지는 삶이 민주주의의 탓인 것이라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당장 드러난 명백한 거짓말은 용인하고 747이라는 비현실적인 공약은 믿어보겠다는 자가당착적 마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적 감시와 정치의 공백 속에서 노골적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들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4대강 예산에는 손도 못 대게하며 국회를 극단적인 충돌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서 비롯되는 정치에 대한 환멸은 다시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이러한 추세와 악순환을 저지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시민들이 정치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역과 삶의 현장을 민주주의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와 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이러한 활동에 유리한 제도,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명박정부 2년을 경험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구구절절히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삶의 현장에 가까이 있을수록 그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침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누가 진정으로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라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나름대로 옥석을 가려가며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소통을 회복시키고 정치를 시민에게 가까이 만들어가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참여 없이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이남주 lee87@mail.skhu.ac.kr